詩가 있는 하루

[스크랩] 2007 시안 신인상 당선작 /카메라 옵스큐라 외 4편/수피아

길가다/언젠가는 2007. 9. 21. 20:36

2007 시안 신인상 당선작

 

 
출처 블로그 > 내 영혼의 깊은 곳
원본 http://blog.naver.com/gulsame/50018633093
 

 

 

카메라 옵스큐라* 외 4편 / 수피아

 

라면 봉지의 부스럭대는 소리로 허기를 채우던
사과 바구니 같은 작은 방

 

작은방의 벽지는 사방이 사과무늬로
가득하다 사과 바구니 같은 작은방에는
통통한 벌레처럼 내가 담겨 있다, 나는
내 근원이 궁금해질 때마다 출출해진다
동쪽 사과 하나를 갉아먹는다
수중동굴이 생긴다 감옥의 시작이다
빠져나가려고 툭툭 주먹으로 쳐보고 발길질도 해 본다
―엄마, 나를 가두지 마세요
동굴 껍질은 요동을 칠 때마다 고무풍선처럼 늘어난다
해발 몇 미터의 동굴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엄마의 속
굳이 말하자면 물은 따뜻하여 양수와 같은 해수면을 가졌다
출입문을 하나밖에 가지지 않은 부엌에 딸린 쪽방에서
280일째 되던 날 문을 발견하고 나는 운다
―처얼썩 처얼썩 엉덩이를 두드려보는 엄마, 제가 또 딸인가요
동굴을 나온 후로 자주 배냇잠을 잔다
잘 때는 사과를 갉아먹던 습관으로 입을 오물거리지만
―엄마, 젖에서 바다냄새가 나질 않아요
―제발 미역국을 주세요
내 어미의 시집살이 덕에 젖은 맵다
매워, 창호지 구멍이 사과 조각처럼 햇살을 뱉는다
그 때
작은방 문을 열고 쑥, 손 들어와 집어간다
백열등이 이르지 못한 곳에서
적당하게 포즈를 잡은 어둠 한 컷


*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어두운 방'이란 뜻의 라틴어. 원래는 작은 구멍을 낸 어두운 방으로, 그 구멍을 통하여 들어간 빛이 방밖의 장면을 구멍의 반대쪽에 있는 방안 벽에 거꾸로 된 상을 만들어낸다.

 

 

캥거루 가죽 모자 / 수피아

 

캥거루 가죽이 다리를 흔들며 수선집에 갔다
해질 무렵 야라 강변을 떠올리기에 좋은
잔디구름 펼쳐진 하늘을 밟고 갔다
캥거루 가죽이 초원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대 이동 할 때는
세일로 불티나게 모자가 팔렸을 때다
미싱에 박히는 날에는 층층이 쌓아 올려져
말 타기 게임을 즐겼다
말이 된 친구의 등은 야생의 숲이어서 진한 박하향기가 났고,
달리다가 엉덩이에 손 짚고 올라타면
허리는 흔들리는 그물 침대가 됐다
말이 된 친구에게는 혹독한 놀이였음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남대문 시장 567번 가게에 들러 앞다리를 수선했다
수선될 수 있는 상처는 쉽게 아물기도 하지만
14 살에 이름을 버린 친구는 튿어진 상처로 남아
내 육아낭 속에서 오래도록 서러워했다
남대문 시장 수선집들을 다 돌아다녀도
오래된 상처는 수선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답변 듣던 날
캥거루 가죽은 다리를 흔들며 은하수를 밟았다
밤 몇 시간쯤은 상처를 가려놓고
어둠은 크라운카지노*를 반짝거렸다

 

* 크라운 카지노(Crawn Casino) : 호주에서는 물론 남반구 최대의 카지노입니다.

 

그리운 mc / 수피아


  누군가가 그립다면 고양이 눈과 눈 사이를 들여다 보세요
  거기 전생이 조그마한 새가 있어요

 

  사람 냄새가 싫어 허공을 헤매다 길을 잃었어요 혼자서 스레트지붕과 지붕 사이를 파도타기 해요 폴짝, 날아 오르면 구름은 푹신한 섬이에요 분노의 붉은 몸뚱어리를 향해 침을 흘리던 시간은 고양이 머릿속에나 있어요 섬을 한 바퀴 돌아도 넉넉한 자유는 반나절 밖에 걸리지 않아요 내가 고양이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짧은 둘레에요 수면 아래로 두려움을 숨기고 사는 섬에서는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될 꿈은 일룰 수가 없네요 절벽에서 뛰어 내려 사뿐히 세상을 버린 바람처럼 눈을 감는다는 것,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무능력하다는 뜻이래요 그러니 헤어져간 누군가가 아직 가슴에 있다면 고양이, 고양이를 오래도록 바라보세요

 

  나의 입과 눈썹, 발가락과 꽁지가 고양이 이마에 분노처럼 박혀 있어요 눈과 눈 사이가 쓸쓸했던 천적은 고양이를 기쁘게 해요 길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분간 할 수 없는 어두운 밤에 암매장된 불빛을 찾아가면 거기......고양이 이마에서 발견되는 토막 난 새


♠ 고양이와 새 : 파울클레의 작품, 추상적인 형태를 즐겨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20세기의 대표적인 천재 화가로 인정 받고 있다.

 

 

성형 된 솔숲 향 / 수피아

 

세탁기에서 솔숲 향이 난다
그것을 당신의 향이라고 정의하자
나를 벗어 던진 옷들이 매일
뚜껑을 열고 당신을 만나러 솔숲으로 간다
회전목마처럼 한바탕 세탁기가 돌아간다
- 물살에, 세제에 헛구역질 해 대는 사각팬티 당신
얼룩말 무늬를 임신했나 보군요
- 이봐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은 깨끗이 낙태해요
- 우린 어차피 뿌리가 없는 나무들이에요
자동세탁 풀 코스대로 잠시 세탁기가 멈추고
메시아의 설교가 목구멍을 빠져나가듯 땟물이 빠져나간다
이어 세탁기는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 새 단장한 코끝과 붉은 립스틱을 훔쳐간
샤도우와 마스카라 긴 눈썹에 걸려있는 와이셔쓰 당신
- 요즘엔 최대한 마르고 예쁜 여자가 대세인 거 알잖아요
- 모두 몸 가늘게 날씬하게 탈수하세요
샤프란 향 한 방울을 넣는 코스에 이른다
숲에 정해진 강수량까지만 물은 채워졌다가
배수로의 어두운 관으로 몰래 빠져 나간다
세탁기의 세상이 바쁘게 돌다가 멈춘다
- 어제의 먼지며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군요
- 완벽해요
세탁기의 뚜껑을 열면
요술향을 입은 울창한 투명숲이다

 


강과 길을 위한 주례사 / 수피아

 

강변을 따라가고 있었어.
풀과 나무 잎새의 계절을 읽으며
그와 나란한 생을 가고 있었어.
예고 없이 내리는 폭우를 잘 견디리라.
수면은 깊게 빠르게 흘렀어 그럴 때마다
흔들 흔들리는 신문, 경제면에 예민한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돌보며 어루만지게 되는
방천(防川)은 수해의 고비마다 상처를 가질 수 있었어.
긴 둑에 허물어져 있는 뿌루퉁한 은혜들.
그가 내 입술에 걸려 넘어져
제기랄 돌부리, 거친 푸념을 했지만
졸지에 엎어져 나와 달콤한 키스를 맛본다는 것.
인생이 별건가? 나는 강을 따라가고 있었어.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백년해로를 언약했어.
백 년의 폭염을 증명하려고 강은 가장 잔인하게 말라갔어.
가능하다면 밑바닥까지 차지한 사랑을 보여주리라.
자락자락 갈라져 피 한 방울까지 가물리라.
구덩이에 묻히는 날까지 끝까지 걸어가다가
밤하늘 환한 구덩이에 이르러 소원을 빌리라.
우리 사랑 영원하기를…… 강변을 따라가고 있었어.
저기 봐, 서걱이며 한 계절을 겪어내고
몸 비벼대는 억새풀 그림자
휘어지는 길처럼 강물에 굴절되는 언약.


 
 수피아

(본명 박영란)
1968년 전남 고흥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2007년 『시안』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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