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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⑦-손택수[중앙일보]

길가다/언젠가는 2007. 8. 24. 13:16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⑦ [중앙일보]


나무는 치욕으로 푸를 수 밖에 …
도시속 서정시인의 고뇌 읽혀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시대에 아무 일도 없던 양 서정시를 쓸 수는 없다며 치를 떨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매일 매일 넥타이 매고 붐비는 지하철 뚫고 출퇴근하는 고단한 생활인에게, 처세서도 아닌 서정시는 아무래도 한가한 느낌이다. 이렇게 점점, 서정시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손택수는 그 와중에도 서정시를 쓰는 30대 시인이다.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며 난해한 시를 쓰는 또래 시인도 많지만, 그는 자신을 자연물에 빗대 노래하기를 고집한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러한 그를 두고 “70년대 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라 칭한다.

도시를 사는 젊은 서정시인의 감수성은 어떨까. 평범한 도시인이라면 보도블록 사이에 옮겨심은 가로수 앞에서 호흡 한 번 가다듬는 정도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간다.

“갓 심어 뿌리를 덜 내린 나무에는 새들이 앉지 않더라. 새들도 이 나무가 아직 뿌리를 못 내려 먹을 벌레도 없을 거란 사실을 아는 것이다.”

앞서 적은 ‘나무의 수사학’은 도시에 뿌리내리려는 시인 자신의 얘기다. 이광호 예심위원은 “나무로 상징되는 서정이 도시 공간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표에서 시는 출발한다. 그래서 나무는 그냥 푸르다기보다는 치욕으로 푸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시인 역시 “처음 상경해 한동안의 나의 삶은 뿌리 못 내린 나무와도 같았다”고 토로했다. 3년 전 부산에서 상경한 시인은 지금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시인의 지난날은 순탄치 못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서너 해를 안마시술소 구두닦이, 목욕탕 때밀이 등으로 먹고 살았다. 대학도 스물다섯 살이 돼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가장 아름다웠던 문학수업의 하나가 안마시술소에서 맹인들에게 책 읽어줬던 일”이라고 회고한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리듬을 타고 읽는 게 더 중요했단다. 시인의 시가 저 낮은 곳을 바라보는 건, 험했던 옛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시에서 서정시를 쓰는 고민의 일단이 얼비친다.

“내 안에는, 그러니까 내가 속한 공간과 시대에는 수많은 모순과 갈등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푸른 서정시를 쓰고 있고, 사람들은 애벌레처럼 또는 새처럼 내 시로 다가온다. 나는 이 모든 게 부끄럽다.”

시인의 후보작 중에 ‘오징어 먹물에 붓을 찍다’가 있다.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오징어 먹물로 쓰여졌다는 얘길 듣고서 쓴 시다. 거기에 이런 시구가 있다. ‘그 글씨들 오래되면 희미하게 지워져서 마침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데, 바닷물에 담그면 먹빛이 그대로 되살아난다고 한다’. 시인은 이 구절을 짚으며 굳게 다짐했다.

“죽음 같은 바다 속으로 시를 수장시키면 다시 선명히 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갖고 나는 시를 쓴다. 이 자본의 시대에서 유배를 떠난 선비처럼 시를 쓰고 싶다. 내 시가 결국 잊힐 것을 알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도르노는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시인 파울 첼란이 ‘죽음의 푸가’를 발표하자 아도르노는 “해를 거듭하는 고통은 고문당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처럼 표현의 권리를 갖는다”며 시를 쓸 수 없다던 발언을 취소했다. 서정시는 힘이 세다, 아직도.


글=권근영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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