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진(장흥)·고향찾기
천관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 /장 석영
길가다/언젠가는
2006. 12. 9. 15:26
천관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장 석영
천관산![]()
서울에서 승용차로 여섯 시간을 달려 전라남도 장흥에 도착했다. 가을이 익어 가는 시골 마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고 있는 감나무에서 진한 모성애를 느낀다. 황금색 무희복 차림의 벼이삭은 그 몸짓이 매우 자유로워 보인다. 길을 따라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오가는 사람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낮은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억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나는 모처럼 시골의 평화로운 정경에 흠뻑 취해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관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영월정에서 양근암, 정원암을 거쳐 연대봉에 이르는 오리五里의 산길은 경사가 급해서 숨이 멎을 것 같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연대봉 아래 쪽 철쭉능선에 자리를 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단숨에 도시락을 비우고 커피까지 한 잔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대양을 바라보며 천하를 호령하듯 서있는 대장바위와 이를 따르는 수백의 병졸바위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위엄을 차리고 서 있다. 천관산은 마치 바위를 전시해 놓은 전시장 같았다. 키가 작은 철쭉나무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마치 종교예식을 치르기 위해 성전에 들어서는 신자들과 같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봄꽃이 지고 빛바랜 잎이 무성한 나무만이 잠잠히 서있다. 연대봉에 도착하니 억새의 하얀빛이 온 산으로 번졌다. 강물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 같다. 가을 햇살에 드러난 속살이 어린아이의 피부와도 같은 억새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무용수들의 춤사위와도 같다. 마른 바람이 연대봉에서 대장봉으로 불면 바람을 따르는 억새의 행렬은 바야흐로 억새축제가 절정에 다다른 분위기다. 하늘거리는 억새의 하얀 머리에는 신령함마저 드러나 보인다. 나는 촘촘하게 서 있는 억새의 틈을 비집고 슬그머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바람이 잠깐 잠을 자는 동안 억새는 무언가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말이 없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알지 못할 소리가 들린다. 정령들이 찾아 온 것인가. 억새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가슴 저리도록 슬프게 전해온다. 순간 강한 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으스스함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백마 타고 날아온 천관녀의 혼령이 한의 눈물을 뿌리는 듯 갑자기 억새바다가 출렁이기 시작한다. 억새의 큰 너울은 지난 시간 저편에 있던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금관가야의 왕손으로 신라에 편입된 김유신 일족은 신라에 확고한 기반이 없는 이방인이었다. 이들 금관가야 후손들은 필사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길을 찾았고 그 길은 신라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뿐이었다. 사랑과 생존 그리고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던 김유신은 천관녀가 있는 기방으로 향하는 말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쳐버리고 신 귀족 김춘추 일가와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 후 천관녀는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홀로 지내며 김유신의 입신양명 立身揚名만을 기도했다 한다. 김유신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한 천관녀의 마음을 알고 천관녀를 찾아가서 데려 가겠다 하였다. 그러나 천관녀는 절대로 장군님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 하면서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얀 말이 내려왔다. 천관녀는 훌쩍 말 등에 올라타고 “장군님 저는 세상의 욕망을 잊고 아름다운 산에 가서 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사시고 부귀영화를 누리십시오.” 하면서 동남쪽으로 달려갔다. 김유신도 천관녀를 놓칠세라 자신의 말에 올라 타고 천관녀가 탄 백마의 뒤를 쫓아갔다. 얼마쯤 달렸을까 문득 눈앞에 바위와 숲과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산이 가로 막았다. 그리고 천관녀와 백마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 길을 가던 사람에게 저 산이 무슨 산이냐고 물으니 이 산이 그 유명한 천관산이라 했다고 한다. 쪽물을 쏟아 붓는 가을 하늘에 제트비행기가 하얀 선을 남기며 지나간다. 그러자 잔잔하던 억새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흐름은 점점 더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늘에 그려진 선과 산위의 하얀 물결이 시계視界 끝에서 마주친다. 백마 탄 김유신이 하늘에 길을 놓으니 사랑에 목이 매인 천관녀가 하얀 치마를 날리며 눈물로 마중하는 것 같다. 나는 한 동안 그들의 사랑 놀음에 혼이 나가 있었다. ‘가슴 저미는 사랑을 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겠지. ’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천관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