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하루

푸른 문장이 사라졌다/최태랑

길가다/언젠가는 2012. 4. 3. 02:06

 

2012년 19회 -시와정신 신인상

 

출처/다음-자연박물관

 

푸른 문장이 사라졌다

----------------------최태랑


길음동 재개발지구
빈집 담을 타고 기어오른 담쟁이
몸으로 쓰는 육필이 난해하다
이층 창문을 지나 처마 끝,
더 갈 수 없다는 듯
팔 벌려 허공을 보듬고 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해 출렁이는 이파리들
바람의 각도를 따라
떨어질 듯 불안한 흔들림도
한때는 요람처럼 즐거웠다


낡은 이층집 벽을 움켜잡고
써내려간 푸른 이력서, 봄이 오면
끊어진 문장이 다시 이어진다
오랜 벽의 살붙이들
틈을 보이던 가난도 질긴 덩굴로 덮고
깊은 한숨도 몸을 포개며 살았다
창문에 가득한 웃음소리도
먼 산을 바라보던 남자도 보이지 않는다


빈집을 향해 달려드는 포클레인
먼지 낀 햇살이 듬성한 파밭으로 내려앉고
아가리를 벌려 집을 물어뜯는 무쇠공룡들
빈집들이 무릎을 꿇는다
마디가 끊어지고 사방으로 푸른 피가 튄다
행간이 끊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문장들
벽을 붙들고 파르르 떨고 있다

 

 

최태랑

전남 목포출생
2012년 22회 인천시민문예대전 대상 수상
2012년<시와정신> 신인상